민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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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덴 전투는 1759년 8월 1일, 7년 전쟁 중 일어난 전투로,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는 하노버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 전투의 패배로 그 해 하노버에 대한 위협을 잃었다. 영국군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병 지휘관 조지 새크빌 경의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민덴 전투는 영국 군대의 전통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참전 부대들은 매년 민덴 데이를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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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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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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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명 | 민덴 전투 |
전쟁 | 7년 전쟁 |
날짜 | 1759년 8월 1일 |
장소 |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민덴 근교 |
결과 | 하노버 선제후국 측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20px]]영국 [[파일:Flag of Hanover (1692).svg|20px]]하노버 선제후국 [[파일:Blason duché ni Brunswick.svg|20px]]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파일:Flag of Hesse.svg|20px]]헤센-카셀 방백국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50-1801).svg|20px]]프로이센 [[파일:Flagge_F%C3%BCrstentum_Schaumburg-Lippe.svg|20px]]샤움부르크-리페 |
교전국 2 | [[파일:Royal_Standard_of_King_Louis_XIV.svg|20px]]프랑스 [[파일:Flag_of_Electoral_Saxony.svg|20px]]작센 선제후국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파일:Flag of Hanover (1692).svg|20px]]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대장 [[파일:Flag of Hanover (1692).svg|20px]]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대장 [[파일: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20px]]조지 저메인 중장 |
프랑스군 지휘관 | [[파일:Royal_Standard_of_King_Louis_XIV.svg|20px]]루이 조르주 에라스메 드 콩타드 원수 [[파일:Royal_Standard_of_King_Louis_XIV.svg|20px]] 빅토르-프랑수아 드 브로이 중장 |
병력 규모 | |
연합군 병력 | 40,000명 |
연합군 포병 | 대포 107문 |
프랑스군 병력 | 55,000명 |
프랑스군 포병 | 대포 86문 |
피해 규모 | |
연합군 사상자 | 전사 618명, 부상 2179명 |
프랑스군 사상자 | 전사 4278명, 포로 3964명 |
프랑스군 손실 | 대포 22문 |
2. 배경
1756년 5월, 프랑스와 영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8월에는 프로이센이 작센을 침공하면서 중앙 유럽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다.[26]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지 8년 만에 발생한 것으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영국과 프로이센은 동맹 관계를 맺었다.[26] 영국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프로이센을 보조금으로 지원했고, 프로이센은 하노버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했다. 하노버는 동군 연합을 통해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했던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고향이었다. 프랑스는 하노버를 점령하여 강화 협상에서 식민지 획득과 맞바꿀 담보를 얻으려 했다.[26]
독일 서부의 영토와 하노버를 방어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그 동맹국들은 하노버 선제후령, 헤센-카셀 방백령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령 및 다른 작은 제후령의 군대로 영국 국왕의 셋째 아들 컴벌랜드 공작을 지휘관으로 하는 감시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이 감시군은 하스텐베크 전투 (1757년 7월 26일)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 이어서 컴벌랜드 공작은 9월 10일 클로스터-체벤 협정을 체결하여 하노버 선제후령 전역이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영국 정부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 영국 국왕의 개인적인 요청에 따라 프로이센의 대장,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페르디난트에게 연합군의 지휘가 맡겨졌다. 그는 1757년부터 1758년 겨울까지 겨울 숙영 중인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라인 강까지 퇴각시켰다. 그리고 1758년 초, 직접 도하하여 크레펠트 전투 (1758년 6월 23일)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전역의 경과와 함께 후퇴를 강요당했지만, 그는 영국군 약 10,000명의 증원을 얻어 견뎌낼 수 있었다. 프랑스 원수 콩타드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라인 강변, 특히 마인 강 부근에서 프랑크푸르트 요새를 포위하듯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작센 선제후령으로부터 원군을 얻은 콩타드 후작은 하노버 선제후령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27] 1759년부터 주도권을 탈환하려 했다. 콘타데스는 진격을 계속하기 전에 재정비를 위해 잠시 멈춘 민덴 주변의 베저 강을 따라 강력한 방어 위치를 점령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강력한 위치를 포기하고 페르디난트를 공격하려는 기회를 거부했다. 대신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병력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콘타데스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 페르디난트의 병력이 지나치게 확장되었다고 판단한 콘타데스는 바라던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7월 31일 밤과 8월 1일 이른 아침에 자신의 병사들에게 방어 야영지를 버리고 민덴 서쪽 평원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7]
2. 1. 7년 전쟁의 발발
1756년 5월, 프랑스와 영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8월에는 프로이센이 작센을 침공하면서 중앙 유럽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다.[26]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지 8년 만에 발생한 것으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영국과 프로이센은 동맹 관계를 맺었다.[26] 영국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프로이센을 보조금으로 지원했고, 프로이센은 하노버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했다. 하노버는 동군 연합을 통해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했던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고향이었다. 프랑스는 하노버를 점령하여 강화 협상에서 식민지 획득과 맞바꿀 담보를 얻으려 했다.[26]
2. 2. 하노버의 중요성
1756년 5월, 프랑스와 영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8월 프로이센의 작센 침공으로 중앙 유럽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1756년 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조약 이후, 영국과 프로이센은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영국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프로이센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프로이센은 영국에 대해 하노버 선제후령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했다. 하노버는 동군 연합을 통해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했던 영국 국왕 조지 2세 (1683년-1760년)의 고향이었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의 대영국 전략은 하노버 선제후령을 점령하여 이후 강화 협상에서 식민지 획득과 교환할 수 있는 담보로 활용하는 것이었다.[26]2. 3. 연합군의 형성
7년 전쟁 당시 프랑스(1757년 하노버 침공 시작)는 유럽 서부의 독일어 사용 국가들을 주요 전장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하스텐베크 전투에서 승리하고, 하노버, 프로이센, 영국에 클로스터체벤 협약을 강요하려 했다.[3] 프로이센과 영국은 협약 비준을 거부했고, 1758년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라인강 너머로 철수했고, 크레펠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로이센 항구인 엠덴도 탈환되어 영국으로부터의 보급을 확보했다. 영국 정부는 9천 명의 영국군을 페르디난트에게 증원했다.[4] 프랑스 왕실 역시 리슐리외 공작의 후임인 클레르몽 백작에 이어 콘타데스 휘하의 증원군을 파견하여 동맹국들이 프랑스가 추구하는 평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했다.페르디난트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프랑스를 격파하기 위해 겨울 주둔지를 일찍 떠났다. 그러나 빅토르-프랑수아, 브로글리 공작과 프랑스군은 베르겐 전투에서 페르디난트의 공격을 막아냈고, 브로글리는 프랑스 원수로 승진했다. 페르디난트는 북쪽으로 후퇴했고, 콘타데스는 민덴을 포함한 여러 마을과 도시를 점령했다.[5]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페르디난트가 프랑스군을 무적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6]
3. 전투의 전개
1759년 초, 양측은 병력 회복에 힘썼다. 연합군은 3월 중순까지 72,000명을 확보하여 뮌스터와 립슈타트에서 작전이 가능했다. 이에 맞서 콩타드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 라인 방면군 66,000명과 브로이 공 지휘 하의 마인 방면군 31,000명이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앞서 주도권을 잡기로 하고, 3월 23일 브로이 공의 마인 방면군을 공격했으나, 4월 13일 베르겐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했다.[28]
콩타드 후작은 이 성공을 바탕으로 연합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5월 초, 베젤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연합군은 함, 할테른, 뒬멘, 코스펠트에서 방어에 나섰지만, 콩타드 후작은 브로이 공의 군대를 향해 마인강에서 헤센으로 진격하여 이 거점들을 우회했다. 콩타드 후작의 군대는 6월 10일 콜바흐에, 브로이 공의 군대는 카셀 근교에 도달했다. 프랑스군은 슈타트베르게를 지나 빌레펠트로 진군했다. 한편, 알멘티에르 후작(1711년-1774년)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이 뮌스터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우세한 적에 밀려 후퇴해야 했고, 7월 8일 오스나브뤼크에 각 부대를 집결시켰다.[28] 그 사이 프랑스 마인 방면군은 베저강 부근의 프로이센 민덴 요새에 접근했다. 브로이 백작은 보병 1,500명과 기병 1,200명을 이끌고 기습, 현지 농민의 안내를 받아 1759년 7월 10일 요새를 점령하고 약탈했다.[29]
민덴 점령 후, 프랑스군은 하노버 국경에 접근하여 연합군을 물리치고 뮌스터와 립슈타트의 창고를 확보했다. 콩타드 후작은 민덴을 하노버에 대한 다음 공세를 위한 거점으로 삼고, 주력을 민덴 남서쪽 바스타우 후방에, 브로이 공의 군대를 베저강 우안에 배치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비서이자 비밀 참모총장이었던 Philipp von Westphalen|필립 폰 베스트팔렌de (1724년-1792년)으로부터 반격 압력을 받았다. 그는 7월 중순 콩타드 후작을 유인하여 증원 전에 회전을 벌이려 했다.[30]
7월 말, 몇 차례 작은 충돌이 있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방겐하임 소장이 이끄는 군단을 '미끼'로 토텐하우젠까지 전진시켰으나 콩타드 후작은 응하지 않았다. 방겐하임 소장은 자진에 갇혀 때를 기다렸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공세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에게 10,000명을 주어 프랑스군 후방에 파견했다. 이 군단이 7월 28일 뤼베케에서 프랑스군 전초를 습격하자, 콩타드 후작은 대응을 강요받았다. 증원이 도착할 때까지 공세자를 맞이하기 위해 브리사크 공작(1698년-1780년)을 파견했으나, 후작은 병참선 위협으로 조기에 연합군을 공격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31]
전장 남쪽은 험준한 비엔 산지와 평행하게 흐르는 바스타우 강으로 구분되었다. 당시 강을 건너는 수단은 교량뿐이었고, 북쪽 강안에는 습원인 Großes Torfmoor|그로세스 토르프모어영어가 펼쳐져 굳은 땅이 거의 없었다. 습원 북쪽에는 베저강을 향해 동쪽으로 내려가는 평야가 있었고, 우안 계곡 가장자리가 좌안보다 높았다. 그 일대는 토텐하우젠, 쿠텐하우젠, 슈테머, 홀츠하우젠 마을로 나뉘었다. 남쪽 절반은 시야가 좋지 않았지만, 습원 쪽에서는 하르툼과 할렌에서 더 트여 있었다. 북쪽에서는 에스퍼 강이 장애물이었지만, 바스타우 강보다 건너기 쉬웠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1758년 3월 14일 프랑스군에 점령된 민덴을 포위, 점령했기에 이 땅을 잘 알고 있었다.[32]
3. 1. 프랑스군의 초기 공세
1759년, 프랑스는 콩타드 원수의 지휘 아래 하노버를 다시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브로글리 공작이 베르겐 전투에서 페르디난트의 공격을 막아낸 후, 콩타드는 진격을 재개하여 여러 마을과 도시를 점령했다. 7월 10일에는 민덴의 전략적 요새를 함락시켰다.[5]
콩타드 후작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연합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759년 5월 초, 베젤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한편, 연합군은 함, 할테른, 뒬멘 및 코스펠트에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콩타드 후작은 브로이 공의 군대를 향해 마인강에서 헤센으로 진격하여 이 거점들을 우회했다. 곧 콩타드 후작의 군대는 6월 10일 콜바흐에, 브로이 공의 군대는 카셀 근교에 도달했다. 프랑스군은 슈타트베르게를 지나 계속 빌레펠트로 진군했다. 그 사이, 알멘티에르 후작(1711년-1774년)이 이끄는 프랑스 측의 다른 군단이 뮌스터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민덴 점령 후, 프랑스군은 하노버 국경에 접근했다. 연합군을 물리치고 뮌스터와 립슈타트의 창고를 손에 넣었다. 콩타드 후작은 잠시 민덴에 머물면서, 그 요새를 하노버에 대한 다음 공세를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3. 2. 연합군의 반격 준비
페르디난트 공작은 프랑스군을 민덴에서 유인하여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콘타데스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7] 7월 중순, 페르디난트는 콘타데스 후작을 자진에서 유인하여, 그가 더 많은 증원을 불러오기 전에 회전을 벌이려 시도했다.[30]7월 말, 페르디난트는 방겐하임 소장이 이끄는 군단을 '미끼'로 토텐하우젠까지 전진시켰으나, 콘타데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에게 10,000명의 병력을 주어 프랑스군 후방에 파견했다. 이 군단이 7월 28일 뤼베케에서 프랑스군 전초를 습격하자, 콘타데스는 대응을 강요받았다.[31]
3. 3. 전투의 시작
1759년 8월 1일 새벽, 프랑스군은 민덴 서쪽 평원에서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프랑스군 우익에서 브로이 공작이 연합군 좌익에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다.[35] 브로이 공작의 군단은 밤중에 베저 강을 건너 민덴을 통과하여 말베르겐과 강 사이의 최종 배치에 들어갔다. 때마침 거센 비가 내려 이러한 움직임은 연합군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전 4시경, 브로이 공작의 부대는 배치 완료 상태였다. 방겐하임 군단의 전초 부대가 이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때 경보를 울렸지만, 방어 준비가 된 대대는 아직 4개뿐이었고 연합군의 다른 부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오전 5시, 브로이 공작의 포병이 방겐하임 군단의 진지에 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브로이 공작은 공격으로의 이행을 주저했는데, 좌익의 니콜라이 사단과 주력군이 아직 그를 지원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연합군은 각자의 방어 진지에 들어갈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이후 연합군 포병은 우월한 화력을 보여주며 첫 번째 교전에서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35]힐레에 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의 본영에서는 '피카르디' 연대에서 온 탈영병 2명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온 오전 3시 30분이 되어서야 적군의 전진을 감지했다. 그 후 공작은 전날의 지침에 따라 즉시 출격을 명령했다. 전초 부대를 이끄는 안할트 공자 카를 레오폴트 중장은 영국군의 경포병 부대를 증원으로 받고 하렌을 점령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곳에는 오전 5시경 이미 프랑스군의 '샹파뉴' 여단이 진출해 있었다. 그 우익에는 '드 루아', '콩데', '아키텐' 여단(총 16개 대대)이 이어져 귤시 백작 소장이 이끄는 제1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후방에서는 작센군의 2개 여단(총 15개 대대)이 작센 공자 프란츠 크사버 소장(1730년-1806년)의 지휘 하에 진군 중이었다. 곧 시작될 전투로 하렌 마을은 급속도로 화염에 휩싸였다.[35]
3. 4. 중앙에서의 격전
프리드리히 폰 슈푀르켄 대장이 이끄는 연합군 부대의 영국 보병(월데그레이브 경과 윌리엄 킹슬리)은 하노버 근위대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기병''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38] 이들은 "북이 울리는 대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를 "북이 울리는 ''소리에 맞춰''" 진격하라는 것으로 오해했다.[39] 프랑스 기병대가 아직 대열에 있었고, 당시에는 '할로우 스퀘어'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두의 영국 연대 6개가 전멸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포격에도 불구하고, 6개 연대는 격렬한 규율과 닫힌 대형을 유지하며 머스킷 사격으로 반복되는 기병 돌격을 격퇴하고 프랑스군에게 심각한 사상자를 입혔다.[42] 콩타드는 "나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보았다. 즉, 단일 보병대가 전투 대형으로 정렬된 세 줄의 기병대를 뚫고 붕괴시키는 것을!"이라고 말했다.[43]오전 6시경, 프리드리히 폰 슈푀르켄 대장(1698년-1776년)이 이끄는 우익 부대가 제분소 근처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영국군 6개 대대[38]와 하노버 근위 연대 소속 2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전진은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북을 울리며 수행하라[39]"는 명령을 내렸으나, 오해로 인해 동 여단은 갑자기 전진을 시작했다. 이 8개 대대는 가문비나무 숲에 숨었고,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공격을 명령했는지, 아니면 다시 오해가 작용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슈페르켄 사단은 프랑스군의 중앙 부대를 향해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이 전열은 1,500보 정도의 트인 땅을 횡단해야 했으며, 프랑스군 포병대는 즉시 십자포화를 가해 큰 손해를 입혔다.[41]
프랑스군 중앙은 피츠제임스 공작(1712년-1787년) 휘하의 기병 63개 중대(약 7,000명)였으며,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피츠제임스 공작은 적 사단의 전진을 보고, 휘하의 제1 부대 중 11개 중대에 공격을 명령했다. 이 공격은 카스트리 공작 중장(1727년-1800년)이 이끌었으며, 영국 및 하노버 제 대대와의 거리는 10미터까지 좁혀졌다. 그러나 이 대대들은 총격에 이어 총검으로 반격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막대한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 그 사이에 피츠제임스 공작은 제2 부대의 "로얄 에트랑제"(기병 8개 중대) 및 "부르고뉴"(기병 6개 중대) 여단을 준비하여 공격을 반복했다.[43] 그러나 이 공격도 큰 손해를 입고 격퇴되었다.[44]
프랑스군 좌익 제1집단을 이끄는 귤시 백작 중장(1715년-1767년)은 슈페르켄 사단의 전진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측면에 전개된 영국 및 하노버 부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휘 하의 제1집단에서 '콩데' 여단과 '아키텐' 여단, 총 8개 대대를 전진시켜 슈페르켄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슈페르켄 장군은 이끌던 제2집단에서 3개 대대를 차출하여 그 공격에 대응해야 했지만, 이들 대대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45]
이 위험한 국면에서 콩토 백작은 슈페르켄 사단을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 중앙에서 마지막 기병 집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 집단은 '장다름' 및 '카라비니에' 연대, 총 기병 18개 중대(약 2,000명)로 구성된 프랑스 귀족 전통의 최정예 부대였으며, 지휘관은 포양느 후작이었다. 이들 기병은 슈페르켄의 제1집단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한편, 측면과 배후에도 돌입했다. 영국 및 하노버 제3집단은 방향을 바꿔 포위 공격에서 몸을 지켜야 했다.[48]
이러한 큰 손해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은 슈페르켄의 여러 대대를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하노버 근위 연대와 영국 제23연대 대대는 뚫릴 정도였다.[50] 그러나 이들 대대가 흔들렸을 때, 부트기나우 중장(1698년-1776년)이 이끄는 헤센 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구원이 도착했다. 하노버의 '방겐하임' 연대와 헤센 근위 연대에 소속된 동 사단의 2개 대대는 '장다름' 연대의 측면에 총화를 퍼부어, 이를 격퇴했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47]
3. 5. 연합군의 승리
영국과 하노버의 숙련된 포병대의 지원을 받은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압박하여 전장에서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오직 후방을 담당한 드 브로이 휘하의 프랑스 부대만이 연합군의 공격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47]4. 전투의 영향
다음 날, 다장 준장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민덴 마을을 넘겨주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25]
프랑스군은 아인베크, 괴팅겐과 Münden (Lichtenfels)|뮌덴 (리히텐펠스)de을 경유하는 우회로를 통해 8월 12일 카셀에 도착했다. 콩타드 원수는 군을 증강하여 재차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연합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8월 2일 민덴을 포위하고 "테 데움"을 제창하며 승전 축포를 쏘았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2세의 구원 요청과 뮌스터 탈환 필요성 때문에 적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뮌스터 요새는 11월 22일에 항복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프랑스군 거점에 대한 작전을 수행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65] 11월, 콩타드 후작은 총사령관에서 해임되고 브로이 공으로 교체되었으나, 그 역시 11월 30일 풀다 전투에서 실패했다. 1760년 1월, 양측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노이비트 사이에서 겨울 야영에 들어갔다.[66]
1759년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는 조지 2세로부터 20,000 파운드의 상여금을 받고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공은 새크빌 경의 해임을 주장하여, 9월 10일 새크빌 경은 면직되었다. 1760년 초 군법회의에서 새크빌은 군에서 파면되었고, "폐하께 헌신하며, 기존의 어떠한 군사적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67]
이후 3년 동안 서부 전선에서 작전이 계속되었지만, 하노버 선제후령이 1759년 여름과 같은 위기를 겪는 일은 없었다. 이는 1759년 11월 25일 영국과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제안한 평화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와 키브롱 만 해전에서의 패배로 재정적 한계에 이르러 이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영국 역시 1758년에 국가 부채로 인한 재정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카이 전투와 마크센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1760년에 프로이센에 대한 승리를 예상하여 강화 조약을 거부했다.[68] 이후 파리 조약 협상에서 프랑스는 하노버 선제후령 점령 실패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프랑스 외교관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잃은 식민지와 교환할 "담보"를 확보할 수 없었으며, 이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의 민덴 전투 승리가 크게 기여한 결과였다.
4. 1. 인명 피해
페르디난트 공작의 군대는 2,8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10,000명에서 11,000명의 병력을 잃었다.[76][2] 양측의 사상자 수는 다음과 같다.[25]구분 | 장교 | 병사 | 합계 | |
---|---|---|---|---|
프랑스군 | 전사 | 127명 | 4,151명 | 4,278명 |
부상/포로 | 352명 | 3,611명 | 3,963명 | |
합계 | 479명 | 7,762명 | 8,241명 | |
연합군 | 전사 | 28명 | 590명 | 618명 |
부상 | 123명 | 2,008명 | 2,131명 | |
합계 | 151명 | 2,626명 | 2,777명 |
사상자의 과반수인 1,411명은 전장의 중심에 선 영국군 6개 대대에서 나왔다.
라파예트 장군의 아버지인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로슈 질베르 폴레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은 이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14] 59세의 프랑스 총검병 장 튀렐은 일곱 번의 칼에 찔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 중 여섯 번은 머리에 입었다.[15]
4. 2. 지휘관의 책임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 지휘관 콩타드 원수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후임으로 브로이 공작이 임명되었다.[13] 연합군 기병 사령관 조지 새크빌 경은 기병대 투입 명령을 여러 차례 무시하여,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0] 새크빌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군사 재판을 요청했으나, "폐하의 군사적 능력에 부적합하다"는 판결을 받고 군에서 파면되었다.[10] 그는 훗날 조지 저메인 경으로 재등장하여 미국 독립 전쟁의 결과에 대한 주요 책임을 지게 되었다.[10]4. 3. 영국의 전통
민덴 전투에 참전한 영국 연대들은 "민덴 연대"라고 불린다. 이들은 전투에서 독일 정원을 지나며 장미를 꺾어 코트에 꽂은 것을 기념하여 매년 8월 1일을 민덴 데이로 기념한다.[16] 이날 각 부대원들은 모자에 장미를 꽂는데, 경보병대는 요크셔 백장미를 꽂는다.[17] 이러한 전통은 요크셔인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기리기 위해 8월 1일을 요크셔 데이로 제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민덴 전투에 참전한 영국 부대와 그 후신은 다음과 같다.
참전 부대 | 현재 부대 |
---|---|
왕립 포병대 | 해당 없음 |
제12 보병대(서퍽 연대) | 왕립 앵글리안 연대의 일부 |
제20 보병대(랭커셔 퓨질리어스) | 왕립 퓨질리어스 연대의 일부 |
제23 보병대(왕립 웰시 퓨질리어스) | 제1대대, 왕립 웰시 (왕립 웰시 퓨질리어스) |
제25 보병대(킹스 오운 스코티시 보더러스) | 로열 스코츠 보더러스(제1대대, 스코틀랜드 왕립 연대) |
제37 보병대(로열 햄프셔 연대) | 웨일스 공주 왕립 연대의 일부 |
제51 보병대(킹스 오운 요크셔 경보병대) | 라이플스의 일부 |
각 부대는 민덴 데이에 다음과 같은 장미를 착용한다.
- 왕립 포병대: 붉은 장미
- 왕립 앵글리안 연대, 왕립 퓨질리어스 연대, 웨일스 공주 왕립 연대: 붉고 노란 장미
- 스코츠 연대: 붉은 장미
- 라이플스: 요크셔 흰 장미
왕립 웰치 퓨질리어스는 모자 배지에 민덴 로즈가 포함되어 있어 일 년 내내 착용하기 때문에 민덴 데이에 따로 장미를 착용하지 않지만, 연대 퇴역 회원들은 민덴 데이에 라펠에 장미를 꽂는다.
영국 육군의 여왕 사단은 2006년까지 "민덴 밴드"를 유지했다. 왕립 포병대의 12(민덴) 포대와 32(민덴) 포대는 매년 8월 1일에 머리 장식에 붉은 장미를 착용하며 민덴 데이를 기념한다.
1967년부터 매년 8월 1일 시카고 주재 영국 영사관에 여섯 송이의 붉은 장미가 익명으로 배달되고 있다. 장미와 함께 오는 메모에는 여섯 개의 연대가 나열되어 있으며, "그들은 장미 정원을 지나 전장으로 진격했고, 잉글랜드의 상징으로 삼각모와 척탄병 모자를 장식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18][19][20][21][22][23]
5. 비밀스런 장미
1967년부터 매년 8월 1일 시카고에 있는 영국 총영사관에 익명의 인물로부터 6송이의 붉은 장미가 배달된다고 한다. 2001년과 2002년에만 장미가 배달되지 않았다. 장미와 함께 6개 연대의 이름이 나열된 쪽지가 배달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들은 전장에서 장미 정원을 넘어 진군하였고, 장미를 그들의 삼각모자와 척탄병 모자에 잉글랜드의 상징으로 장식하였다. 이들 연대는 오늘날에도 민덴의 날을 기념하고 있으며, 용감한 그들의 선조를 기념하는 이 날마다 그들의 모자를 장미로 장식합니다."[2] 영사관은 장미와 쪽지를 보내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원을 확인하려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기증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6. 한국의 관점에서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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